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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좌진

by 초롱초롱 2020. 6. 10.

1. 생애

1889. 11. 24일 출생~1930. 1. 24일 사망

 

2. 독립운동가

1920년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의 사령관으로 청산리전투를 이끔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3. 청산리대첩

★청산리대첩은 청산리에서 일어난 한 번의 전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대에서 일어난 여러 전투를 통틀어 말한다.

★북로군정서군(김좌진)과 대한독립군(홍범도)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가 간도에 진출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10여회의 전투를 통해 대파한 전투를 통틀어 청산리 대첩이라고 한다.

★백운평 전투, 완루구 전투, 천수평 전투, 어랑촌 전투, 맹개골 전투, 만기구 전투, 천보산 전투 등 일본군에게 크게 타격을 가하여 대한독립에 대한 열망을 불태운 전투였다.

 

4.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1920. 6. 7. 일제는 봉오동 전투에서 대한독립군에게 크게 패한 후, 간도지역에서의 독립군을 토벌할 목적으로 간도지역에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한다.

1920. 10. 19. 독립군부대는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병력을 후방으로 이동시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으나, 김좌진부대는 추적을 더 이상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일본군과의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1920. 10. 21. 청산리 골짜기의 백운평에서 첫 전투가 벌어졌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은 백운평 골짜기 통로의 좌우에 600여명을 매복시키고 일본군이 완전히 들어서자 일시에 기습 공격을 가하여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백운평 전투가 청산리 대첩의 가장 첫 번째 벌어진 전투였다.

1920. 10. 26일까지 엿새간 10여 차례의 전투가 일어났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표에 의하면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은 1,200명이 전사하였고, 2,100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반면 독립군은 130명의 전사자와 22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일제에 항거한 무장 투쟁사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전투였기에 청산리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전투를 모두 합쳐 청산리대첩이라고 한다. 

 

 

 

5. 적은 수의 병력으로 일제의 5개 사단의 막강한 병력을 무찌른 뛰어난 전술, 독립을 향한 열망에 그는 대한민국 무장 독립 운동의 역사에서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청산리대첩은 일제에 항거한 삶, 독립을 위해 총과 칼을 들었던 삶, 그의 삶에 숙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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